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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에 피어나는 믿음 / 창 11:10-30

창 11:10-30


1.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흩어졌고, 언어는 혼잡해졌습니다.

‘바벨(Babel)’이라는 단어가 ‘섞이다, 혼돈되다’라는 뜻입니다.

‘벽돌과 역청’으로 대표하는 기술의 발달과 문명 건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그 기술과 문명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섞으셔서 서로 불통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창 1:28), 인류를 온 땅에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벨탑 문명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 문명을 직접 파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명 파괴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판단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과 하나님을 뜻을 거스르는 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신 겁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자신들이 쌓은 바벨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결국 사람에 의해 망합니다.

오늘날 최첨단 기술문명인 AI 역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먼 훗날 사람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눅 21:33)


천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지 안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기술과 문명이 없어집니다.

그럴지라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언약하신대로, 뜻대로 이 땅에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벨탑 이야기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셈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0장에서 살펴본 대로 노아의 세 아들은 각기 이 땅에서 번성했습니다.

야벳의 자손은 해안가를 따라 퍼져나가 그리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유럽 문명을 이룩했고, 함의 자손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따라 퍼져나가 고대 제국을 이룩했습니다.

반면, 셈의 자손은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것도, 고대 제국을 이룩한 것도 아니었지만,

셈의 자손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님 없는 인류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라면,

셈의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셈의 족보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족보라는 것입니다.

셈에서부터 아브라함까지 내려오는 족보에는 이름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도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셈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구원사를 위해서 택함 받았습니다.

창세기 9장 27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셈에게만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벳의 하나님 여호와’나 ‘함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셈’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과 함의 자손들은 찬란한 문명과 강력한 제국을 만들었지만,

그에 반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셈의 후손들은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셈의 후손들을 통해서 찬란한 문명과 강력한 제국을 만들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셈의 후손들은 야벳과 함의 자손들에 비해서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았을까요?


하나님은 위대함이나 뛰어남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평범함입니다.

‘평범하다’는 것은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속에 강함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부족함 속에 주님의 온전함을 드러내십니다.


‘위대함, 뛰어남, 훌륭함’은 세상이 원하는 것이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위대한 자, 뛰어난 자, 훌륭한 자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범한 자로서, 아니 연약하고 부족한 자로서 우리를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기 위해 살아 가는 것입니다.


셈의 족보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는 말씀처럼,

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그 계보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찬송과 예배가 흘러갔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의 조상 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때 그 믿음의 꽃이 찬란하게 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의 삶이 평범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 안에도 믿음의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10-26절까지는 <셈의 족보>라는 제목으로 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까지 그 이름이 열거됩니다.

27절에서는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셈에게서 아브라함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나홀과 하란, 두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동생 하란이 결혼하여 롯을 낳고는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게 됩니다.

막내 동생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슬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 데라의 슬픔은 더욱 컸을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큰 아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30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대를 잇지 못한다는 것은 곧 저주로 인식되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막내 아들을 잃어버리고,

큰 아들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겁니다.

아마도,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데라는 31절을 보면,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래,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나갑니다.

오늘식으로 말하면, 멀리 이민을 가는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가정은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슬픔과 아픔, 결핍과 상실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사’를 위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이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을 때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사야서 43장 19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우리의 상황이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일을 시작하실 때는,

우리 삶에 먼저 광야와 사막과 같은 상황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광야와 사막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다가온 슬픔과 아픔, 결핍과 상실은 하나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신다는 사인이었습니다. 1

2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지를 보여주실 겁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셈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입니다.

야벳과 함의 자손들은 화려한 문명과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지만,

셈의 자손들은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것이 곧 ‘위대함, 뛰어남,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위대하거나, 뛰어나거나, 훌륭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평범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때론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때론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은 주님의 강함이 되고, 우리의 부족함은 주님의 온전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슬픔과 아픔, 결핍과 상실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평범한 아브라함의 가정에 슬픔과 아픔, 결핍과 상실을 허락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새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새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사막과 광야와 같은 상황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찾아오는 사막과 광야는 하나님이 내게 새 일을 행하신다는 사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가 이같이 기도합시다.

“주님, 평범한 나의 삶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를 둘러싼 상황이 광야와 사막과 같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주를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 평범한 나의 가정에 믿음의 꽃이 피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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