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눅 15:11-32
- Hoon Park

- 2025년 3월 26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4월 16일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영혼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세 개의 비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는,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시는 주님의 ‘간절함’이 강조됩니다.
반면,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잃은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기다림’이 강조됩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철없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비유가 시작합니다.
12a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성경시대 ‘유산’이란, 말 그대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아버지 생전에 유산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빨리 죽어 달라’는 의미요, 아버지와 이제 모든 관계를 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율법으로는 돌 맞아 죽을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요구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이 철없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12b절,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여기서 ‘각각 나눠 주었다’는 것은, 유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요구하지 않은 첫째 아들에게도 나눠주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철없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내게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바로 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철없는 둘째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릴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철없는 요구를 결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가지고 곧장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갑니다.
그 떠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다 허비합니다(13절).
14절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 많은 재산을 다 허비한 후 궁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가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궁핍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궁핍함’입니다.
인생에서 물질의 궁핍함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적인 궁핍함’입니다. 이 ‘영적인 궁핍함’은 육적인 것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탕자는 영적인 궁핍함과 함께 물질의 궁핍함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방인에게로 갑니다. 들에서 돼지를 치는 자가 됩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라서 이스라엘에서는 돼지를 치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탕자는 자신의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정한 것인 줄 알면서도 돼지를 치는 자가 된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궁핍함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허기짐이 더욱 심해져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해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 더 이상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겁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서야 드디어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스스로 돌이킨다’는 것은, ‘철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대게 고생이나 고통,
아픔, 고난, 연단 등을 통해서 철이 듭니다. 철이 들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리고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떠난 아들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은,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철이 들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알 때까지 아버지는 기다리신 겁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탕자가 집을 떠날 때는 고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다 헤어진 누더기 옷을 걸쳐 입고 있습니다.
단정했던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헝클어져 있고, 기름기 흐르던 얼굴은 바짝 야윈 몰골로 변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아들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먼저 달려갑니다.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한순간도 그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는 간절하게 기다리셨던 겁니다.
그 아들이 돌아왔으니 아버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온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더 기쁘게 한 것이 있습니다.
21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 아들이 영적으로도 철이 든 겁니다.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해서 떠나갈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을 줄 아는 영적으로 철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철이 든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자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잘 돌아봅니다.
영적으로 철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께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돌이키는 ‘회개’의 삶을 살아갑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 아버지가 한 일이 있습니다.
잔치를 베풉니다.
22-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마시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둘째 아들은 스스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시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날 버리고 떠난 자식’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자식’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푸시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3. 그런데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었지만, 맏아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큰 아들의 분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변합니다. 그 내용이 29절과 30절입니다.
자신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순종하고 섬겼습니다.
그에 반해 동생은 아버지 유산을 받아 떠나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동생을 기쁘게 맞아 줄 수 있는지, 어떻게 잔치까지 베풀어 줄 수 있는지 분노한 겁니다.
맏아들이 이렇게 분노와 원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분노와 원망 때문에 집 안에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맏아들을 달랩니다(28절).
아버지도 그런 맏아들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겁니다.
31-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말을 들은 맏아들은 이후 어떻게 하였을까요?
아버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온 동생을 함께 반겨하며,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이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는 열린 결말입니다.
이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4. 오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를 더 사랑한 겁니까? 큰 아들일까요? 둘째 아들일까요?
아버지가 사랑한 아들은 둘 다 똑같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있던 아들이나,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이나, 아버지의 사랑은 동일합니다.
그럼,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아들은 누구일까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에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반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와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결론적으로 큰 아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도 탕자인 셈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몸이 떠났던 탕자였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마음이 떠난 탕자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기다리신 것은, 몸이 떠난 둘째 아들만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떠난 첫째 아들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겁니다.
우리 중에 누가 첫째 아들과 같은가, 누가 둘째 아들과 같은 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이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석해서,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아버지와 함께 즐거워하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5. 오늘은 간단하게 이렇게 기도합시다.
첫 번째,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큰 아들은 늘 아버지 곁에 있어도 그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두 번째, 아버지께로 늘 돌이키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큰 아들의 마음은 아버지 곁에 있어도 아버지께 향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늘 마음이 향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세 번째,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기에,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했습니다.
예배는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구원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예배자가 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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