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시선과 마주하는 자가 되십시오 /눅 22:54-71
- Hoon Park

- 2025년 4월 16일
- 6분 분량
2025년 4월 16일(수)
1.
고난주간 수요일 새벽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붙잡히신 예수님이 처음 끌려가신 곳은 대제사장의 집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힘은 전직 대제사장이요,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있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은 서로 마당을 공유하고 있는 대저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멀리서 뒤따라간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간 “또 다른 제자”가 사도 요한이라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4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어둠이 짙게 내린 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어둠 속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평상시 베드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처음 했던 자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함께 데리고 올라가신 제자요,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케 하신 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서 늘 ‘가까이’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평상시와는 달리 어둠 속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간 것입니다.
33절에서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
그 패기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으로 인해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긴 채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실 때까지만 해도 늘 ‘가까이’ 따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실 때는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긴 채 ‘멀리서’ 따라가는 자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이 은혜와 능력을 베푸시는 자리나 주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자리에는 우리도 주님과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리에는 오늘 베드로처럼 어둠 속에 내 자신을 숨기고,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가려고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베드로와 같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시다.
2.
대제사장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를 처음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6절)고 말하자,
베드로는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57절)고 단번에 부인합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또 알아보고는 “너도 그 도당이라”(58절)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58절)고 두 번째 부인합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9절)고 장담합니다.
이 세 번째 사람이 이렇게까지 장담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그는 베드로에 의해 귀가 잘린 말고의 친척이요,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0절)고 완강하게 세 번째 부인합니다.
그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서로 마주친 겁니다.
이때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실망과 좌절의 눈빛? 슬픔과 허탈함의 눈빛? 분노의 눈빛?... 결코, 이런 눈빛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34절).
그래서 혹시 이런 일 때문에 베드로가 믿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베드로의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예수님은 미리 기도 하셨습니다(32절).
그러니 지금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베드로를 향한 사랑과 긍휼의 눈빛이었을 겁니다.
‘네가 나를 부인했어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한 것이란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는 모두 네 사람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 앞에서는 그가 자신을 숨기고 속이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 앞에서는, 61절 이하에 보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신 겁니다.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말씀 앞에서 통곡하며 회개케 하신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늘 언제나 나를 정죄하고, 나를 판단하고, 나를 비난하고, 나의 허물을 들춰내려는 눈빛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우리는 늘 긴장하며 나의 진정한 모습을 숨기고, 속이고,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의 내 모습과,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내 모습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섬길 때도 있고, 사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도 있고, 사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헌금할 때도 있고, 사람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듣는 척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시선들 때문에 이뤄지는 나의 신앙적인 행위들은 결코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참된 삶의 회개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위선과 가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언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까요?
언제 내가 쓰고 있는 위선과 가식이라는 가면을 벗게 될까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한 베드로가 그 주님의 시선 앞에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통곡하며 회개하였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한 자만이,
나의 위선과 가식이라는 가면을 벗는 회개를 하게 되고, 진정한 신앙인으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서로 마주보고,
베드로처럼 내게도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3.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예수님이 계신 바다 위를 걸어갔던 자입니다.
베드로는 진정 주님을 사랑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저함 없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부인했을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데도 삶 속에서 부인하며 살아갈까요?
프랑스의 위대한 수도자인, 샤를 드 푸코 Charles de Foucauld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1858년에 태어나서, 오랜 수도원 생활을 하다가 1901년 그의 나이 43세가 되었을 때 신부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 아베스라는 가난한 무슬림 지역으로 들어가서 15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1916년 12월에 아프리카의 한 원주민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 베스라는 무슬림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15년 동안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느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무덥고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는 척박한 환경이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과 변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신의 연약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우리도 저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난주간 이 새벽 시간에 일어나 새벽 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 예수님이요,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나의 힘들고 문제가 많은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그 믿음이 없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움 속에서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그 수도자의 말이 깊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아십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정죄와 비난의 시선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 아신다는 사랑의 시선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하게 될 때, 이런 믿음 없는 내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나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고요히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십자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했습니다.
그 주님의 시선 앞에서 진정한 변화와 회개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내 삶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앞에 나아가 고요히 기도의 무릎을 꿇고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하는 자가 됩시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때는 늘 가까이서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는 어둠 속에서 멀찍이 떨어져 따랐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려고 하지만,
말씀과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 고통과 힘듦이 있는 일에 있어서는 멀찍이 떨어져 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훗날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에 있어서도 주님 가까이서 따르는 자가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늘 가까이 따르는 자로 변화되길 기도합시다.
두 번째,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결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도 아니요,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잡혀 가시는 그날 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샤를 드 푸코 수도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삶이 고통스럽거나, 힘들거나,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있을 때 그 속에서 주님이 가장 선하고 온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신뢰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세 번째,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하기를 기도합시다.
이 새벽, 여러분은 누구의 시선을 마주하고 계십니까?
사람의 시선을 마주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시선에 마음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시선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시선을 마주하십시오.
베드로가 주님의 시선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이 새벽, 우리가 주님의 시선을 마주함으로 우리 안에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연약함 속에 강함이 되시고,
나의 부족함 속에 온전함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