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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고전 12:12-31

2026년 6월 20일(토)

1.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성도들에게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직분, 다양한 사역이 주어집니다.

성도마다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 사역을 맡기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은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은사와 직분과 사역은 한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기에 우열이 없습니다.

차등은 있을 수 있어도 차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맡겨진 직분대로, 부여받은 사역을 통해,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를 ‘몸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요,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지체들입니다.

13절 말씀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주님의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다 똑같은 한 성령을 마시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갑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두신 자들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교회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은사는 한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시고, 직분은 한 주님께서 맡기시고, 사역은 한 하나님께 서 허락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구성원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교회 생활에서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 생활이 재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적인 친목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나이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삶의 가치관과 상식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공동체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몸에 비유합니다.

우리 몸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각 지체는 생김새도 다 다르고, 맡은 역할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지체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

둘째, 교회의 지체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월감과 열등감입니다.

15-16절입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일반적으로 손이 발 보다 더 주목을 받고, 눈은 귀보다 더 주목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 보다는 손을 더 귀하게 여기고, 귀 보다는 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 우리는 손으로 건넵니다. 발로 건네지는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이 아닌 발로 선물을 준다면 어떨까요? 받는 사람은 손으로 받을 때는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발로 받을 때는 불쾌하게 여기고 화를 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손은 자신이 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발은 자신이 덜 중요한 존재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21절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눈에 낀 눈곱을 떼어 내는 것은 손입니다.

또한 머리가 원하는 대로 몸을 이동시켜주는 것은 발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을 향해 쓸 데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발을 향해 쓸모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손과 발, 눈과 귀, 머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더 우월한 지체도 없고 더 열등한 지체도 없습니다. 우리 몸에 쓸모없는 지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지체로서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각 지체는 서로 협력하여 몸 전체를 건강하게 세워갑니다.

결국 모든 지체가 함께 선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필요 없는 지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더 우월한 자도 없고, 열등한 자도 없습 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데 꼭 필요한 지체들입니다.


22-23절입니다.

...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 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사람의 눈에 약해 보이는 지체일수록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내장 기관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체들은 우월감도, 열등감도 조심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여기지도 말고, 반대로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원하셔서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지체의식’입니다.


3.

셋째, 교회의 지체들은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25-26절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큰 부자인 랍비의 집 대문 기둥에 등을 비비며 긁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부자 랍비는 그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힌 뒤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다음 날, 이 이야기를 들은 한 거지 부부가 자신들도 부자 랍비의 집 대문 기둥에 등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랍비는 그들을 꾸짖고 쫓아내었습니다.

거지부부가 불공평하다며 이유를 묻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온 거지는 혼자였기에 스스로 등을 긁을 수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둘이면서도 서로 등을 긁어줄 수 있지 않 느냐?”

공동체를 주신 이유는 서로 돕고 돌보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돕고 돌보며,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기쁨과 영광을 얻으면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의 바른 모습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몸 안에 두셨습니다.

또한 원하시는 대로 각 지체에게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다양하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지체들은 모두 귀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진 은사도 귀하고, 직분도 귀하고, 사역도 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존귀한 지체들이 모여 있고,

존귀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맡아 감당하고 있는 데 왜 서로 분쟁하고 다투는 걸까요?

그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몸에 두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이 다 존귀하고, 은사나 직분이나 사역이 다 존귀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분쟁하고 다투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좋아 하지 않습니다.

때론 ‘사랑’ 해야지 라는 결심을 해도, 오래 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요,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사모하고 기도해야할 것은 이겁니다.

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3장에서는 “더욱 큰 은사”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지식’은 노력하고 배우면 얻을 수 있습니다.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은사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깊이 깨닫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은 쌓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지식은 쌓여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생활을 오래한다고 해서 쌓여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4.

오늘은 우리가 이같이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 모두 교회 안에서 지체의식을 갖게 하소서.’

‘주님, 우리 공동체가 주님의 몸으로서 건강하게 세워져 가게 하소서.’

‘주님, 우리에게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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