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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님만 바라봅시다./눅 9:28-36

1. 오늘 말씀은 일명 ‘변화산’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변화산’이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된 곳이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것이지, 실제 지명은 아닙니다.

‘변화산’이 정확히 어느 산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높은 ‘다볼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가까운 ‘헐몬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온 것 때문에 ‘시내산(호렙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시내산(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율법을 받은 산이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지나가시는 등을 보고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들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의사 누가는 이 산이 어떤 산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 역시 이 산을 다만 “높은 산”(마 17:1)이라고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 산이 어떤 산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 산이 어떤 산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입니다.

앞서 8장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러 가실 때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갔었습니다(눅 8:51 이하).

이들은 훗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3인방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수장이 됩니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모시고 살다가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변화산이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간 세 제자의 이름은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변화산’이 아니라, 제자 곧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 교회는 변화산이 아니라, 제자 곧 사람들 안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실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역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을 사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 전통을 사람보다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려고 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도, 교회 건물도, 교회 전통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사람들은 변화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이 어떤 산인지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그 산에 함께 오른 ‘베드로, 야고보, 요한’, 곧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 장면을 기록할 때, 그 산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게 하시고, 그곳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간 제자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2.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목적은 “기도하시러” 였습니다(28절).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깊이 졸았습니다.

32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가 너무나 힘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올라가서 깊이 졸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일어나 함께 기도하자’고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셨을 때도, 이들은 모두 자기에 바빴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데리고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억지로 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분의 방법으로 결국 기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기도하는 자리에서 졸거나 자기에 바빴던 제자들이,

훗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후 제자들은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도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라도 열심히 기도하면 됩니다.

때가 되면 우리가 기도하는 이 자리에 다른 사람들도 와서 기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29-31절까지는 기도하시던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첫째,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됩니다. 29절,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둘째, 하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31절을 보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는,

예수님처럼 용모가 변화되거나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그런 변화는 아닙니다.

기도 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우리 마음이 변화되게 하십니다.

골로새서 4장 6-7절의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또한 기도할 때,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때론 성경 말씀이 생각나게 하거나, 내 마음에 뭔가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는 자가 되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평안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우리 마음에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셨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는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 곁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은 모른 채 “깊이 졸고” 있었습니다.


3.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깊이 졸다가 깨어났을 때,

예수님의 변화된 영광스런 모습과 그 곁에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33절,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런데 33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한 마디로 베드로는 횡설수설한 겁니다.

그때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서 변화산을 뒤덮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변화산에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35절,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는 굉장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들었던 말은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주신 ‘율법과 예언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와 엘리야 앞에서 하나님께서 임재 가운데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예수)의 말을 들으라”


율법(모세)과 예언서(엘리야)의 말씀이 가리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36절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예언서를 대표하는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이제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할 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32)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분은 주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음성은 주님의 그 은혜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자들이 됩시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지체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변화산이 어떤 산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간 제자들이 누구인가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세우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역도 중요하고, 건물도 중요하고, 교회 전통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고,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두 번째, 묵묵히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서는 졸기도 하고,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훗날에는 기도의 사람들이 됩니다.

기도의 자리에 묵묵히 나아가십시오.


기도할 때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성령의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려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점점 기도의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우리가 언제나 묵묵히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세 번째,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시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분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음성은 그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이 땅에 온전히 이루십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언제나 나를 부탁합시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언제나 내 가족을 부탁합시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언제나 우리 공동체를 부탁합시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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