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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가지 가르침 /눅 12:49-59

최종 수정일: 2025년 4월 16일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불을 던지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49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께서 땅에 던지러 오신 ‘불’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앞의 본문에 ‘사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이 이 땅에 던지러 오신 불은, 곧 ‘사명과 말씀’의 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다른 표현을 선택한다면, ‘자기 십자가’입니다(마 16:24).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사명과 말씀의 불’을 던지시면, 우리는 그 ‘사명과 말씀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사명과 말씀의 불’은 주님이 내 마음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 불이 내 마음에 붙으면, 그 무엇으로도 쉽게 꺼지지 않습니다.

박해나 고난, 방해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불을 쉽게 꺼뜨리지 못하게 합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이 더욱 커지고 확산하는 것처럼,

박해나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면 내 안에 붙은 사명과 말씀의 불이 더욱 커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회개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외쳤지만,

귀담아듣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롱과 모욕, 수치와 박해를 당하기만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런 자들에게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마음이 답답해지는 겁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의 마음에 붙은 불이 바로 ‘사명과 말씀’의 불이었습니다.

마음에 붙은 사명과 말씀의 불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습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그 불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되지 않습니다.

‘사명과 말씀’의 불은 내가 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 ‘사명과 말씀’의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는, 마음에 바로 이 ‘사명과 말씀’의 불이 붙은 자들입니다.

이 ‘사명과 말씀’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리요”...

우리 마음에 ‘사명과 말씀’의 불이 붙어 있다면 주님이 더 원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그 마음에 ‘사명과 말씀’의 불이 붙어 있습니다.


50절입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새번역 성경에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성경에서 ‘세례’는, 내가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받을 세례”란, ‘십자가의 죽음’을 뜻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사명과 말씀의 불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2. 51-53절까지는 ‘분쟁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머어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분쟁’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가정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으면, 언제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일시적으로 분쟁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대게 가족입니다.


예컨대, 어느 날 내 자녀나 내 배우자가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어서, 신학교에 간다고 하거나 선교지로 가겠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럴 때 가정 안에 ‘화평’ 보다, 일시적으로 ‘분쟁’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도 신학대학에 가겠다고 처음 부모님께 말씀드리던 날, 제 아버지께서 집안의 모든 성화 액자를 버리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말씀과 사명’이 내 마음에 불붙어서 그것을 행하려고 하면,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 주로 가족들과 일시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은 사람은 이런 ‘분쟁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는 ‘화평’이 이뤄집니다.

성도는 기본적으로 화평한 자(곧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때론 일시적인 ‘분쟁(갈등, 혼란)’도 각오해야 합니다.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어서 주를 위해 달려갈 때, 처음에는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주님이 모든 관계를 ‘화평’하게 되는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3. 54-59절까지의 말씀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분별하라고 의문문으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시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56절,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도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사람들이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분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의문문으로, 시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곧 오실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시대를 분별한다는 것은 곧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든 시대입니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SNS, AI 등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연결성, 초지능화, 초고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문명의 변화가 더디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빠르게 문명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분별해야 할 것은, 이 시대가 종말의 때인지 아닌지, 마지막 심판의 때인지 아닌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57절,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오늘 이 시대는 점점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옳은 것’의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세상은 성경이 ‘옳은 것’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경이 ‘옳은 것’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나를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내 마음에도 주님의 불이 붙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천 년의 교회 역사는, 주님이 각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말씀과 사명의 불’을 던지신 역사입니다.

마음에 그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은 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불을 던지십니다.

그 불은 말씀과 사명의 불입니다.

그 불이 내 마음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게 붙기를 기도합시다.

더불어 우리 안에 기도의 불, 성령의 불, 거룩의 불이 타오르기를 기도합시다.

또한 그 불이 꺼지거나 소멸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두 번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화평케 하는 자, 곧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진리를 양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진리를 후순위에 둬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오히려 진리를 위해서는 분쟁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 복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분쟁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뒤를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때, 진정한 Peace Maker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세 번째, 시대와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시대를 분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지식’은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은 자, 배움이 많은 자가 시대를 분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말씀과 사명의 불이 붙어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가는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성령이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는 자가 시대를 분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할 줄 압니다.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옳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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