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되십시오 /눅 23:26-43
- Hoon Park

- 2025년 4월 18일
- 5분 분량
2025년 4월 18일(금)
1.
고난주간 금요일 새벽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처럼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죄수 바라바와 함께 죄인의 자리에 서서 마지막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의 뜻대로 살인자인 바라바는 풀어주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는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에 군병들은 예수님을 관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옷을 벗기고, 희롱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8-30절까지를 보면,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찬양과 경배와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할 만왕의 왕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이토록 심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말씀 한 마디로 산 자를 죽이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생명과 죽음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의 이런 희롱과 모욕과 멸시를 다 참아 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서 53장 4-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우리가 나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채찍을 맞으실 때 예수님의 몸에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살점이 패인 자리에는 하얀 뼈가 드러났습니다. 붉은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씌웠을 때는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아프셨고 고통스러우셨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2.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 대한 희롱을 마친 후에,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게 했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골고다’를 ‘갈보리’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라틴어 ‘Calvaria’를 영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 뜻 역시 ‘해골’입니다.
그러므로, ‘골고다 언덕, 갈보리 언덕, 해골 언덕’... 이는 명칭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이 언덕은 ‘죽음의 언덕’입니다.
골고다(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가는 그 길 이름을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라고 부릅니다.
‘비아 Via’는 ‘길’이라는 뜻이요, ‘돌로로사 Dolorosa’는 ‘고난, 슬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신 그 길을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길은 고난과 슬픔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비아 돌로로사’는 약 400m 길이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따라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까지 중간에 모두 14번 멈추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에 가면,
예수님이 14번 멈추셨던 지점마다 예수님을 묵상하는 그림과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 멈추었을 때, 더 이상 힘이 없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일으키려고 채찍질을 가했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일어설 기력마저 없으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인들이 그 곁을 지나가던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본문 26절에 기록된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입니다.
‘구레네 사람’이란,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람을 뜻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비아 돌로로사 곁에서 지켜보다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된 것입니다.
‘자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였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막 15장 21절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입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이런 문안 인사를 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이 문안을 전한 이 ‘루포’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둘째 아들이요,
루포의 어머니는 그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은 시몬의 아내인 루포의 어머니를 일컬어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지만,
그 일 때문에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온 가족은 훗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의 가족은 로마에 가서, 로마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를 바울이 ‘내 어머니니라’고 부를 정도로,
시몬과 그의 아내는 신앙이 깊어서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영적인 부모가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때론 ‘억지로’라도 믿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내키지 않을지라도 ‘억지로라도’ 내게 맡겨주신 말씀과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억지로’라도 믿고, ‘억지로’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라 할지라도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이면’ 더 좋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으면 ‘억지로’라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십시오.
3.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살점이 다 뜯겨지는 채찍을 당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까지 힘겹게 올라가신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우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발과 양 손에 커다란 대못이 박힙니다. 그리고 그대로 십자가에 들려 매달리십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그 고통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숨을 거두실 때까지 고통스럽게 매달려 계셔야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셨을 겁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십자가 처형을 일컬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고통을 주는 처형 방법이라고 평가될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겪고 계실 때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 가졌습니다(34절).
백성들과 관리들은 서서 구경하며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절)
군인들은 신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
예수님의 양쪽에 매달린 행악자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8절)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이처럼 모욕과 희롱과 비방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요?
우리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비웃고, 희롱하고, 비방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사 53:4)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끔찍한 고통을 겪으시며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그 모습을 보며 백성들과 관리들은 비웃고, 군인들은 희롱하고, 한 강도는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 하나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34절의 용서 기도는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 비웃는 자들, 희롱하는 자들, 비방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43절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간구한 강도에게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다른 한 행악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9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은 너무나 끔찍한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질고와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 시각에,
비웃고, 조롱하고, 비방하며 그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만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처럼 성금요일에 비웃고 조롱하고 비방하며 시간을 보내는 자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는 적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
예수님이 겪으신 그 십자가 고통에 함께 동참해 봅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금요일 오후 3시까지 금식하며 주님을 묵상해왔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그 고통에 동참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그 고통에 동참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큰 십자가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암송하며 묵상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예수님과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자의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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