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살리는 불씨가 됩시다. /대상 5:1-6:81
- Hoon Park

- 6월 8일
- 5분 분량
2025년 6월 4일(수)
1.
역대기서는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쓰여진 이스라엘의 역사서입니다.
반면, 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기 때 쓰여졌습니다.
역대기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성전 중심적인 관점입니다.
역대기서는 역대상 29장과 역대하 36장, 모두 6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무려 30장이 예루살렘 성전을 준비한 다윗과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에 두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서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배’입니다.
유다 왕조에서 가장 부강하고 풍요로웠던 시대는 ‘예배’가 살아 있는 시대였습니다.
반면 유다 왕조가 멸망하던 시대는 ‘예배’가 죽은 시대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입니다.
열왕기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두 기록한 반면,
역대기서는 오직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남 유다 왕조의 역사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의 혈통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역대기서는 다윗의 혈통인 남유다 왕조의 역사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윗에 이르고, 다윗의 자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대기서를 살펴볼 때,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와 하나님의 구속사,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살펴봐야 합니다.
2.
역대상 1-9장까지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사울 왕까지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5장은 요단강 동편, 가나안 땅이 아닌 곳에 정착한 지파들에 대한 계보입니다.
이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입니다.
1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으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권을 잃어버립니다.
그 이유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이 야곱의 첩인 빌하와 동침한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창 35장).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는데,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르우벤은 죄 때문에 장자권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요셉 위에 아홉 명의 형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장자권이 요셉의 자손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겨졌습니다.
이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깊이 기억해 두었습니다(창 37:11).
훗날 요셉의 꿈대로 된 것을 본 야곱은,
장자권이 요셉에게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창 49:22-26).
2절입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요셉에게는 장자의 명분이 주어졌지만,
주권자 곧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은 유다의 혈통을 따라 태어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장자권은 요셉에게 주어졌지만,
영적인 믿음의 장자권은 유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이 아니라, 유다에게 믿음의 장자권이 주어졌을까요?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유다의 어머니는 레아입니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친 언니입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계략으로 레아와 혼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9장 31절을 보면, 레아가 야곱에게 얼마나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었는지,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요, 늘 남편의 사랑을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레아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겁니다.
그래서 레아에게 태를 열어 첫째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르우벤’입니다.
레아는 첫째 아들을 낳고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창 29:32)
레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지만, 그녀가 기대한 것은 남편 야곱의 사랑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인 ‘르우벤’은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레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곱은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둘째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은 레아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창 29:33)
그래서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짓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여전히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셋째 아이를 낳게 하십니다. 레아는 셋째 아들을 낳고는,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4)고 생각하면서 이름을 ‘레위’라고 짓습니다.
레아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세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의 온 생각은 ‘남편 야곱’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레아에게 넷째 아이를 낳게 하십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고서야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남편 야곱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겠구나...’
그래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 29:35)라는 고백과 함께 넷째 아들을 ‘유다’라고 이름 짓습니다.
레아는 아들 유다를 낳고 나서야, 야곱을 향하던 그 마음을 이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아들 유다를 볼 때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자신의 고백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레아는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낳은 후부터, 레아는 더 이상 불행한 여인이 아닙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복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때,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될 때 행복하게 됩니다.
훗날 야곱이 죽어서 조상들의 묘지인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 묻힐 때, 야곱 옆에 묻힌 사람은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자식들을 축복할 때 유다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던 레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유다를 위해서 이같이 축복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8-10)
유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다는 어머니 레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유다의 자손을 통해 다윗의 왕조가 이어지고, 그 혈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와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역대상 5장 1-10절까지는 르우벤 지파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에, ‘육적인 장자권은 요셉 자손에게, 믿음의 장자권은 유다에게’있다는 것을 기록한데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3.
6장은 레위 자손들에 대한 계보입니다.
15절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가니라”
유다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이 레위인이면서 제사장인 ‘여호사닥’도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예배가 회복됩니다.
여호사닥의 아들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훗날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스룹바벨과 함께 진두지휘를 했던 사람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제사장 여호사닥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을 위하여 그 안에 심어 놓은 믿음의 불씨였습니다.
31절부터 48절까지는 레위 자손들 중에서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에 대한 계보입니다.
레위 자손은 크게 고핫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이 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핫자손은 성막의 기물을, 게르손 자손은 성막을,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부속물을 관리했습니다.
이처럼 레위 자손들이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9장부터 이어질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내 삶에 예배가 살아나길 기도합시다.
역대기서를 공부하면서 내 안에 살아나야 할 것은 ‘예배’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배’가 무너져가는 시대입니다.
‘예배’가 살아나는 시대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배’가 죽어가는 시대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암흑기가 됩니다.
레아는 유다를 낳고서야 개인의 영적인 암흑기를 벗어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예배가 살아나고 회복되길 기도합시다.
영적 암흑기에서 벗어나는 자가 되길 기도합시다.
두 번째, 예배를 살리는 불씨가 되길 기도합시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에 꺼져가는 예배의 불길을 살리는 데 쓰임 받은 것은 여호사닥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수아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꺼져버린 성전 예배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했습니다.
내 자신이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에 예배를 살리는 불씨가 됩시다.
이 시간에 나를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에 예배를 살리는 불씨로 사용하시길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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