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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자가 아닌 중보자가 되십시오 / 스 9:1-8

2025년 11월 13일(목)


1.

BC 536년, 1차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BC 488년, 제사장이요 율법에 능통한 학자인 에스라가 2차 포로 귀환 백성들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그들은 성전에서 감격적이고 기쁨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에스라에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와서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감격은 충격이 되고, 기쁨은 슬픔과 통탄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영적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마저 이방인들을 따라 가증한 우상을 섬겼던 겁니다.

영적지도자들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혼합주의 신앙에 빠진 겁니다.


과거 유다가 멸망당한 것도 혼합주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스룹바벨은 ‘오직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두 세대도 안지났는데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적지도자들이 혼합주의 신앙에 빠진 것입니다.


둘째, 정치 지도자들이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2절,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율법에는 이방 여인들을 아내나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과거에는 모든 나라와 민족마다 각기 섬기는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이방 여인이 섬기는 우상이 따라 왔습니다.

그 때문에 남자들이 아내를 따라 우상을 섬기게 되었던 겁니다.


솔로몬은 이방 아내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도 바알 선지자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남유다의 여호람도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정략결 혼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금한 것은 신앙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들(방백들과 고관들)이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는 일에 더욱 앞장섰던 겁니다.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혼합주의 신앙에 빠졌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인 방백들과 고관들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며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 리로 받아들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들이 신앙적으로 무너지자, 백성들도 따라서 무너진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타락은 거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붕괴는 곧 신앙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게 합니다.

지도자들의 영적 거룩함은 공동체의 영적 거룩함이 되지만,

지도자들의 영적 혼합과 영적 타협은 공동체 공동체의 예배와 신앙의 삶을 오염시키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2.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이런 현실을 전해 듣고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절,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속옷과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내면의 찢어진 마음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뜯었다’는 것은 깊은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에스라는 거룩과 신앙이 무너진 현실을 들었을 때, 그의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슬픔과 통곡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울었던 겁니다.


죄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생각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적 습니다.

에스라는 죄와 잘못에 대하여 비판하고 분노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슬픔과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자였습니다.


그런 에스라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4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라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에스라 곁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에게 이들을 붙여주신 겁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눈물의 기도를 흘릴 줄 아는 자에겐 그런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혼합주의 신앙에 빠지고 현실 앞에 타협하며 사는 자들에겐 역시 그런 사람들이 모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신앙대로 유유상종이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라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 줄 아는 자들’입니다.

에스라 역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다수는 혼합주의 신앙에 빠집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것과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소수의 신앙의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혼합주의 신앙을 거부하고 오직 여호와 중심의 신앙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실에 타협하지 않습니 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혼합주의 신앙에 빠져 있고, 정치지도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현실과 타협하고 있을 때, 이를 알게 된 에스라는 슬픔과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떠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3.

저녁 제사 때가 되자,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합니다.

그 내용이 6절부터 15절까지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살펴볼 내용은 6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합니다.


죄를 지은 것은 에스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회개 기도를 한 것입니다.

6절입니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님에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겁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악”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중보자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중보자가 되려하기 보다 언제나 심판자가 되려고 합니다.

심판자는 남의 죄와 허물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남의 죄와 허물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공동체 안에 심판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중보자는 언제나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능력은 중보자의 마음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루어집 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느헤미야 등

이들은 심판자가 아닌 중보자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무릎을 꿇었던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심판자의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중보자의 자리입니다.

겸손히 예수님처럼, 지체의 죄와 허물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중보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결한 믿음과 거룩한 삶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에 빠졌습니다.

순결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정치지도자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거룩한 삶 보다는 좀 더 나은 현실적인 삶을 위해 타협한 겁니다.


믿음은 섞이면 안됩니다. 순결한 믿음이 섞이면 신앙이 부패합니다.

삶도 섞이면 안됩니다. 거룩한 삶이 현실과 타협하여 섞이면 신앙의 타락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섞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순전한 믿음, 순전한 찬양, 순전한 기도, 순전한 예배, 순전한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결한 믿음과 거룩한 삶을 위해 살아가도록 기도합시다.


두 번째, 심판자가 아닌 중보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비난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심판자는 사람의 행위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주님의 마음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심판자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비판, 판단, 정죄,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에스라는 심판자가 아니라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심판자가 아닌, 중보자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을 붙여주시길 간구합시다.


세 번째,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지도자는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공동체가 타락합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거룩하면 공동체가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이 지도자답게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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