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나의 이야기 / 요 18:12-27
- Hoon Park

- 4월 5일
- 4분 분량
고난주간 월요일 3/30/26
1.
예수님께서 붙잡히셔서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조용히 뒤따라간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15절을 보면, 한 사람은 ‘베드로’요, 또 한 사람은 ‘다른 제자’입니다.
이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는,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을 아는 자”라는 것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밝힙니다.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당시 예루살렘의 대 부호들은 갈릴리에 있는 어부들을 지정하여 물고기를 납품 받았습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사도 요한의 아버지 세배대도 어부였는데, 안나스 대제사장 가문에 물고기를 납품하는 사람이 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아버지를 따라 대제사장 집을 자주 출입했었기 때문에 그 집 하인들 과도 안면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연스럽게 대제사장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요한은 문을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도 안에 들어오게 했습니다(16절).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베드로의 믿음이 시험대 위에 오릅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묻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7절)
이에 깜짝 놀란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나는 아니라”(17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이는 두려움 앞에서 드러난 인간의 연약함이었습니다.
마당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 한 번 베드로를 알아본 사람이 묻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절)
그러자 이번에도 베드로가 단호하게 “나는 아니라”(25절)고 예수님을 두 번째 부인합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귀가 잘린 말고의 친척 중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아주 결정적인 증언을 합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절)
그러자 베드로는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나는 아니라”(26절)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베드로는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
베드로의 그 말은 결코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듣기 좋은 립 서비스로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그 고백은 적어도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만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자를 정도로 강하게 저항을 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실 때도,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뒤를 몰래 따라갔습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믿고 따르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자가 됩니다.
신앙은 결단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사랑만으로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는,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고난 주간은 ‘내가 주님을 얼마나 믿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존재인가,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나는 얼마나 믿음이 연 약한 존재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2.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아니라’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했을 때 “곧 닭이 울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닭이 울었을 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마 26:75)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서에는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고 증거 합니다(눅 22:61).
이때 베드로와 마주친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원망과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정죄와 비난의 눈빛이었을까요? 냉소적이고 차가운 눈빛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눈빛은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눈빛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의 눈빛이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다 이해한다는 용납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던 겁니다.
우리는 원망과 실망의 눈빛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눈빛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원망과 실망의 눈빛, 정죄와 비난의 눈빛, 냉소적이고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삽니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사랑의 눈빛이요, 용서의 눈빛이요, 용납의 눈빛이요, 긍휼의 눈빛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자인지, 내게 어떤 허물과 단점이 있는지를 발견하면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어떤 자인지, 내게 어떤 허물이 있는지, 내게 어떤 악함이 있는지를 다 아시면서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주님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따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빛과 마주친 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회개의 눈물을 흐르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깊은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그 십자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을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나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처럼,
때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때로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삶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람 앞에서 믿음을 숨기며 삽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기준을 따르며 삽니다.
순종보다는 육체의 편함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믿음보다는 현실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은 원망과 실망하는 눈빛이 아닙니다.
정죄하고 비난하는 차가운 눈빛도 아닙니다.
언제나 한 결 같이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시는 따뜻한 눈빛입니다.
그 주님의 눈빛이 오늘 이 새벽에,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빛과 베드로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눈빛과 서로 마주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그 주님의 눈빛 아래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회개하는 깊은 통곡을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회개의 은혜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3.
오늘은 고난주간 월요일 새벽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요, 가톨릭에서는 1대 교황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런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를 오늘도 주님은 말없이 바라보십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빛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사랑과 용서의 눈빛, 용납과 포용의 눈빛, 이해와 긍휼의 눈빛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십 니다.
고난주간 월요일 이 새벽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새로운 신앙적인 결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눈빛을 통해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처럼,
나 역시 사랑과 용서의 눈빛, 용납과 포용의 눈빛, 이해와 긍휼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사랑에 있습니다.
4.
주님,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주님을 부인하며 삽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음을 따르지 않고 현실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습니다.
늘 실패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나의 믿음이지만,
그런 나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오늘 십자가 아래에서 나의 눈빛이 그 주님의 눈빛과 마주하게 하소서.
주님의 눈빛 앞에서,
내 안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게 하시고, 다시 주님만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또한 오늘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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