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 Hoon Park

- 2025년 4월 10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4일(금)
1.
오늘 본문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까지를 살펴보면,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2절에서는 삭개오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세리장’이라는 표현은 세리들 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도시의 세무국장입니다.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지역의 세리장이였습니다. 더불어 부자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대에 유대인이었던 삭개오는 세상적으로 소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삭개오가 이방인의 개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도 존경과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둬 로마에 상납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는 삭개오의 신체적인 특징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키가 작고...”
그 당시에 키가 작다는 것은 150cm 이하도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이렇게 키가 작았다는 것은, 가난한 집 출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못 먹고 자라서 키가 아주 작았던 거죠.
삭개오는 가난한 집 출신이요, 아주 키가 작은 자로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자랐을 겁니다.
그때 느낀 그의 열등감이 더욱 성공해야 되겠다는 욕심과 야망으로 불타올랐을 겁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로마를 위해 충성하는 세리가 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가 세리장이 되었다는 것은, 로마를 위해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아주 충성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반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는 세금을 악랄하게 거둬들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존경과 환영을 받지 못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삭개오의 성격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
삭개오가 키가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포기할 법 한데, 삭개오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한 번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 목표를 이루는 성격인 겁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세리장의 자리까지 올라갔을 겁니다.
이런 삭개오가 3절을 보면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겁니다.
삭개오에게 왜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삭개오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아직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잃은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택함 받을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집 출신의 키가 작고, 열등감 때문에 야망이라는 탐욕을 품고, 성공하기 위해 로마의 앞잡이가 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동족 유대인들에게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악랄하게 세금을 거둬서 세리장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런 삭개오를 택하신 걸까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택함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을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택함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택함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택함 받을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이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쳐다보시고’라는 단어를 주목해 봅시다.
삭개오는 그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을 뿐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무화과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신 겁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예수님이 이미 그를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즐겁게 맞이합니다.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입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세리로 사는 동안에 분명 로마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 로마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들은 모두 로마식 이름을 사용했었습니다.
마치 일제시대 일본을 위해 일하던 한국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던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삭개오라는 히브리 이름을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로마식 이름으로 불리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삭개오야’라고 그의 히브리 이름을 불러 주신 겁니다.
그러자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영접한 겁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는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해집니다.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의 이름만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자인지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불러주십니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황홀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난 ‘첫 사랑’의 기쁨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8절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이런 다짐을 합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되갚아 주겠다는 것,
이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첫 사랑의 기쁨이 넘치는 자는 이런 회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시켜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첫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힌 자는 스스로 회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3.
삭개오는 그 마음에 예수님을 만난 첫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삶’을 사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하더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뭇 사람’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삭개오뿐만 아니라, 삭개오와 같은 자들을 이방인의 개로 여겼습니다.
이런 자들은 죽어도 마땅한 자로 여겼습니다.
세리장의 자리에 올라갈 만큼 악랄했던 삭개오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수군거린 겁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회개의 삶을 살게 된 자는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누구에게 임할까요?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사람은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기쁨이 너무 커서, 회개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도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삭개오는 결코 구원받지 못할 자요, 이방인의 개로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정작 구원에서 멀어진 자들이 됩니다.
이처럼,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법입니다.
마지막 10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편가름을 합니다.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심하면, 그들은 죽어도 마땅한 자라고까지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같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마저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음은 미움, 증오,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라 할지라도 저들을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롬 12:14).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롬 12:21).
나에게는 원수요, 대적자요, 죽어도 마땅한 자로 여기는 자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도 잃어버린 자요, 예수님이 찾아 구원하시려는 자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들처럼 나중 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4.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오늘 주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삭개오를 그의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습니다.
‘나쁜 놈, 나라 팔아먹은 놈, 죽일 놈, 로마인의 개 등등...’ 이렇게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삭개오야’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소리는 ‘내가 너를 다 안다’는 사랑 가득한 목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 시간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 ‘내가 너를 다 안다’는 사랑 가득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내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두 번째,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합시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는,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합니다.
오늘 주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은, 오늘 내 삶(가정, 일터)에 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드립시다. 내 가정의 문을 열어 드립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예수님 내 마음에 들어오소서. 예수님 내 가정에 들어오소서. 예수님 내 일터에 들어오소서”...
세 번째,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자가 됩시다.
삭개오가 있던 자리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자는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회개의 삶을 다짐한 것은 삭개오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한 자는 삭개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놓쳤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을 놓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처음 된 자가 나중 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자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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