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맛 레히'가 '엔학고레'가 됩니다. /삿 15:1-20
2026년 10월 1일(목)
1.
삼손이 혼인 잔치에 참석한 블레셋 청년 30명에게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그 청년들이 일주일 안에 맞추면 그들에게 베옷과 겉옷 30벌을 주고,
만일 맞추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14:11-14).
수수께끼의 내용은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14:14)였습니다.
청년들은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다가,
삼손의 아내를 이용해서 결국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냅니다.
삼손이 내기에서 진 것입니다. 이는 아내가 그 답을 청년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아내에게 화가 나서 친정에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4:20).
그러자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친구에게 아내로 줘버렸습니다.
삼손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내에 대한 화가 진정되자 삼손은 아내를 데리러 다시 딤나에 내려갔습니다.
1절입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밀 거둘 때'란 5월에서 6월경입니다.
이때는 건기라서 비가 내리지 않는 시기입니다.
삼손은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 염소새끼를 가지고 장인 집에 찾아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사실을 알고는 더욱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분노는 블레셋 사람들을 향하게 됩니다(3절).
삼손은 들판에 나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았습니다.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그 꼬리 사이에 횃불을 달아서 추수 중이던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때문에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이 모두 불살라졌습니다(4-5절).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도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6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결국 성난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와서 삼손의 장인과 아내를 불사르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삼손은 블레셋에 대해서 더욱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아무리 힘 센 장수라 할지라도 블레셋 사람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도망을 쳐서 에담 바위 밑에 숨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드러난 것은 분노와 보복으로 점철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을 치고 계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2.
삼손은 에담 바위 아래로 숨어들었습니다. 에담 바위는 유다 지파 영내에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으려고 에담 바위까지 몰려 왔습니다. 유다 지파의 영토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유다 지파가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유는 유다지파의 영토를 쳐들어온 블레셋 사람들을 대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다지파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11절 중, “…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너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삼손과 힘을 합하여 블레셋과 맞서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보다 블레셋 사람들을 더 의지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삼손은 같은 동족과 맞서 싸울 수 없어서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순순히 붙잡혀줍니다.
그러자 유다지파 사람들은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줍니다.
이것이 사사시대 말기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사를 신뢰하거나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사사들이 사사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할 사사가 오히려 자신의 욕심과 욕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손 역시 사사답지 못한 사사였습니다.
그 결과 사사에 대한 권위나 사사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는 블레셋을 더 두려워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을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이런 사사시대 말기의 특징은 오늘 이 시대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목회자에 대한 권위와 신뢰가 땅에 떨어진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보다 세상과 물질을 더 의지하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돌이키고 바르게 세워져야 할 모습입니다.
3.
블레셋에게 넘겨진 삼손이 결박당한 채 블레셋의 영토인 '라맛 레히'에 끌려갔습니다.
14절입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레히에 도착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성난 파도처럼 소리 지르며 삼손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앞서 14장에서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서 마주친 젊은 사자도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임해서 삼손이 젊은 사자를 손으로 찢어 버렸습니다(14:6).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여호와의 영이 강하게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15절입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삼손은 실수와 허물이 많은 자입니다. 삼손은 사사답지 못한 자입니다.
유다 지파마저 그를 사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삼손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블레셋을 심판하시는 일을 행하신 겁니다. 이는 결코 삼손의 힘과 능력, 지혜로 이룬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십시오. 삼손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라고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내가 했다'고 자기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자기의 공로라고 자기를 높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삼손이 중간에서 가로챈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두지 않으십니다.
18절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삼손으로 하여금 갑자기 심히 목이 마르게 하십니다.
얼마나 목이 마른지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을 만큼 삼손에게 심한 갈증이 일어났습니다.
그제서야 삼손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 고백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16절에서 주어는 ‘내가'였는데, 18절에서 주어가 ‘주께서'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목마름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이 모든 일은 삼손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려 물이 솟아나오게 하십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신 후 정신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19절).
‘엔학고레'라는 이름은, '부르짖는 자의 샘, 기도하는 자의 샘'이라는 의미입니다.
4.
마지막으로 19절을 읽읍시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라맛 레히는 삼손을 죽이려고 했던 곳입니다. 또한 삼손이 죽고 싶을 만큼 심한 목마름의 고통을 느꼈던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소생케 하는 샘물이 흘러나오는 '엔학고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라맛 레히'와 같을지 모릅니다.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갈증나게 하고, 온갖 죽음의 고통이 느껴지게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라맛 레히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주님은 그 자리를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솟아나오는 엔학고레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라맛 레히와 같은 내 삶의 자리가 생명수가 넘치는 엔학고레가 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 나의 삶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오늘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씀 위에 바르게 세워지게 하소서.'
'주님, 오늘 내 삶의 자리가 인생의 고통을 주는 라맛 레히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흘러넘치는 엔학고레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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