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 /눅 20:41-21:4
- Hoon Park

- 2025년 4월 10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9일(수)
1.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은 사무엘하 7장 12-13절에서 처음 계시되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말년에 주어진 이 말씀은, 처음에는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말씀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2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지은 후,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메시야 대망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말씀은 새롭게 재조명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에 대한 말씀이라기보다,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감추어 두신 ‘메시야’를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후손, 아들)’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다윗의 자손(아들)’이라는 표현이 공관복음서에만 모두 15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메시야에 대해서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옛날 다윗 왕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할 강력한 나라를 만들 왕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마디로, 옛 다윗의 명성을 되찾는 메시야를 기다렸던 겁니다.
이들의 문제는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으로만 편협하게 해석한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물으십니다.
41절, “...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겁니다.
이어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고백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 1절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다윗이 ‘내 주’로 고백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44절입니다.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은 맞지만, 다윗의 자손은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도 ‘내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볼 때, 사람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보고, 편협하게 이해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무엘하 7장 12-13절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 1절의 말씀은 간과했습니다. 부분적으로만 보고 편협하게 이해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이 지은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그리스도는 다윗이 ‘내 주’라고 고백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고, 성경을 편협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는 늘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2.
45-4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외식을 삼가라(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긴 옷’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사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지도자답지 못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47절입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당시에 ‘과부’는 ‘고아, 나그네’와 함께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지켜주고, 도와줘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사회적 약자인 과부를 돌보고 지키고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가산을 가로챘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길게”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외식’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성경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말씀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것을 가로채는 불의한 자들이었던 겁니다.
성경과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맺는 사람이라면 사람과의 관계성도 바르게 맺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맺으려 하면서도, 정작 사람과는 바르지 않은 관계를 맺고 산다면, 그것이종교적인 ‘외식’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적인 외식을 삼가라(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3.
21장 1-4절까지는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성전 뜰에 헌금함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향해 들어오는 자들은 누구나 헌금함에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어느 특정한 단체나 교회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도 헌금했고, 가난한 자들도 헌금했습니다.
부자들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두 렙돈’의 가치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요즘 LA 하루 일당이 130 불입니다. 그러니 두 렙돈의 가치는 약 2불정도 됩니다.
그러니 부자들에 비해서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헌금은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3절, “...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 이유를 이같이 설명하십니다.
4절,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처럼, 헌금의 가치는 액수에 있지 않습니다.
헌금의 가치는 믿음과 마음에 있습니다.
과부는 ‘두 렙돈(2불)’이 그녀가 가진 생활비의 전부일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그 과부의 마음은 많은 헌금을 하는 부자보다 더 많이 드린 자요, 믿음이 더 큰 자요, 마음이 더 큰 자였습니다.
헌금은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적다고 해서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나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통해서 그 사람의 믿음의 크기가 보여 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 있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도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의 현실 속에서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성령의 도움을 구합시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2-13절 말씀을 근거로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열방 위에 가장 강력한 나라로 세울 다윗과 같은 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메시야는 다윗이 ‘내 주’로 고백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고 메시야에 대해서 편협하게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일깨우신 겁니다.
우리도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편협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 내 생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겸손하게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래야 오늘 말씀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바르게 말씀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연약한 자들을 우선순위에 둡시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해를 끼치는 것은 종교적인 ‘외식’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중요한 만큼 사람과의 관계성도 중요합니다.
특히 연약한 자, 없는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우선순위에 둬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연약한 자들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이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이 되길 기도합시다.
세 번째, 헌금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아갈 때, 내 믿음만큼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많고 적음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내 믿음을 물질에 담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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