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바입니다 / 요 18:39-19:16
- Hoon Park

- 4월 5일
- 4분 분량
고난주간 수요일 4/1/26
1.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풀어 주려고 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을 해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특별 사면 대상 후보에 오른 사람은 두 명이었습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입니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18:40).
그냥 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인 강도였을 겁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렸던 겁니다.
반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례대로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둘 중 누구를 사면하면 좋을지를 유대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연히 ‘죄 없는 예수를 풀어주라’는 요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은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해는 안되지만 빌라도는 무리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주며 채찍질을 받게 했습니다(19:1).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 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웠습니다. 몸에는 왕의 색깔인 자색으 로 된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예수님을 조롱하며, 손으로 때리며 모욕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 빌라도는 유대인들 앞에 나와서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공표합니다(19:4).
이미 예수에게 채찍질을 가했으니, 이정도 선에서 예수를 풀어 주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거칠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6절)
빌라도가 아무리 예수에게서 사형을 시킬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을 해도,
유대인들은 막무가내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이때 빌라도의 심정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이때 빌라도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일까요?
죄 없는 예수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마다 총독을 파견했습니다.
그 총독은 장차 로마 황제가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그 총독은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마이너스 점수를 받게 됩니다.
식민지 백성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폭동이 일어날 정도라면, 이런 사람은 로마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 습니다.
빌라도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를 풀어 주었다가 유대인들의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자신의 출세가도가 막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썼습니다.
그럴수록 유대인들의 반발은 더욱 심했습니다. 자칫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4절)
‘너희의 왕인 예수를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절)
심지어 대제사장들까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
결국 빌라도는 자신의 출세가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2.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빌라도에 대해서입니다.
빌라도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 없는 예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출세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5절을 보면,
이런 빌라도의 결정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것입니다.
더 큰 이유는, 자신의 출세길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빌라도는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바라던 대로 출세 길이 열렸을까요? 그의 야망대로 로마 황제가 되었을까요?
요세푸스 역사가의 기록을 따르면, 그는 불과 몇 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을 당합니다.
이후 어떤 보직도 받지 못한 채, 야인으로 지내다가 칼리굴라 황제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같은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이후 ‘빌라도’라는 이름은, ‘가룟 유다’와 함께 2천년 세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금기시된 불명예스런 이름이 되 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예수님을 풀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설령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출세 길이 막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은 2천년 역사 속에 ‘의인’으로 기억되었을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영원한 죄인의 이름이 되었지만,
‘바울’은 영원한 의인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버린 빌라도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진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린 바울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난주간 수요일 새벽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겠는가?’
3.
둘째, 바라바에 대해서입니다.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석방되었습니다.
전날까지 바라바는 사형 받을 날을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새벽에 잡혀오지 않으셨다면, 바라바는 꼼짝없이 그날 십자가 처형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바라바가 풀려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 자리는, 실은 바라바가 달려야 할 자리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발(bar, 아들) + 아바(abba, 아빠)’라는 합성어입니다.
곧, 바라바는 ‘아바(아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바(아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바’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자요,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바라바’입니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요, 죄로 인해 십자가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넘겨지심으로, ‘바라바’인 우리가 풀려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달려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바라바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자신이 운이 좋아서 살아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후 그는 어떤 생을 살다가 마감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면,
이후 그는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또 다시 강도와 같은 악을 행하며 살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되었을 겁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수요일입니다.
내가 ‘바라바’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런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내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으면, 작은 것이라도 보답하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군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다면 평생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물며,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이십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큰 사랑과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그런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오늘도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4.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바라바와 같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빌라도처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사는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바울처럼 진리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릴 줄 아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가 바라바와 같은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그 은혜를 아는 자로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고난주간을 지나며,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 앞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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