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습니다 / 요 19:17-27
- Hoon Park

- 4월 5일
- 5분 분량
고난주간 목요일 4/2/26
1.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17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골고다’는 히브리 말인데, 그 뜻은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골고다’를 ‘갈보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라틴어 ‘Calvaria’를 영어화한 것으로 그 뜻 역시 ‘해골’입니다.
골고다 언덕, 갈보리 언덕, 해골 언덕...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골고다(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가는 그 길 이름을, 라틴어로는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라고 부릅니다.
‘비아’는 ‘길’이요, ‘돌로로사’는 ‘고난,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신 그 길,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과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교회 전승을 따르면,
그 길은 약 400m인데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까지 모두 14번 멈추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면, 비아 돌로로사 길 위에 예수님이 14번 쉬셨던 지점마다 예수님을 묵상하는 그림과 글을 새 겨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 멈추었을 때, 더 이상 힘이 없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일으키려고 채찍질을 가했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일어설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이때 로마 군인들이 그 곁을 지나가던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구레네 사람’이란,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람을 의미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를 올라가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들이 시몬에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던 겁니다.
‘자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였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처음 지고 간 사람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
그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는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이렇게 문안 인사를 남깁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이 문안 인사를 남긴 ‘루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둘째 아들이요, ‘그의 어머니’는 시몬의 아내였습니다.
바울은 시몬의 아내인 루포의 어머니를 일컬어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족은 로마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니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이 깊은 여인이었던 겁니다.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였지만,
그후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족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주 안에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라는 말을 통해서,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였지만 그일이 주 안에 택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2.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팻말에 적힌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씨였습니다(19절).
그 아래서 예수님을 못 박은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취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신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 곁에서 울며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내 인생이 힘들고 괴로울 때,
내 곁에 끝까지 있어주는 사람만큼 위로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에게도 그 여인들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각은 오전 9시요, 숨이 지신 시각은 오후 3시입니다.
이 여인들은 6시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간 사람이었다면,
이 여인들은 ‘자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훗날 구레네 사람 시몬 부부가 사도 바울의 영적인 부모가 되었던 것처럼,
이 여인들은 훗날 예루살렘 교회를 태동하는 일에 주역이 됩니다.
3.
십자가 곁에는 이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26-27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전승에 따르면, 이후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에 가서 정착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중에서 오직 사도 요한 만은 약 94세에 자연사를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젊은 나이에 선교지를 누비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 요한은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는 일을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부탁하신 마지막 말씀을 끝까지 따른 겁니다.
순교는 큰 일이요, 위대한 사명입니다.
반면, 모친 마리아를 섬기고 사는 일은 상대적으로 작은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사역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비록 작은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요한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사실 큰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보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큰 일은 무시하지 않지만, 지극히 작은 일은 너무나 쉽게 무시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큰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성실하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이같이 칭찬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요한은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마리아가 숨을 거둘 때까지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선교지에서 순교의 영광을 누릴 때, 요한은 그렇게 늙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AD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가 됩니다.
그때 그의 나이 89세였습니다.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쓰게 하셨습니다.
AD 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을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납니다.
다시 에베소에 돌아왔을 때,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말년에 요한은 제대로 서서 설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늙고 병약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만 전했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설교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 성도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요한을 일컬어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라는 큰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일평생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며 늙어 가다가 결국 자연사를 했습니다.
AD 100년경, 나이 94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다릅니다.
그 십자가는 ‘주님의 말씀과 사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레나 사람 시몬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인들처럼 ‘자원하여’ 십자가 곁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자들처럼 ‘순교’라는 큰 일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도 요한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지극히 작은 일처럼 보이는 일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십자가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게 하는 힘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여인들이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것도 주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도 주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끝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주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까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사랑하십시오.”
복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성경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이 맡기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를 간구합시다.
4.
주님,
주께서 골고다 언덕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은,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부끄러운 사랑입니다.
주를 향한 사랑이 없는 자들에게는,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그 십자가가 주의 사랑을 경험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시고,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길이 되게 하소서.
또한 주를 향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에게는,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켰던 여인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사도 요한처럼 지극히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주님, 우리 안에 주를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게 하소서.
주를 향한 사랑이 식어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를 향한 사랑이 더욱 뜨거워져가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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