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요 18:28-38
- Hoon Park

- 4월 5일
- 4분 분량
고난주간 화요일 3/31/26
1.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을 받으신 후, 로마 총독 빌라도의 공관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28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이방인의 집인 빌라도의 공관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의 거처는 부정한 곳이요, 부정한 곳에 들어간 자는 부정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저녁에 시작되는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공관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모습입니까?
앞에서는 자신들의 거룩을 지키려고 하면서도,
뒤에서는 거짓 증인을 세우고,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믿음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 뒤에 있는 신앙인격입니다.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신앙인격은 추악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그를 위해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에 대해서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5:20,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반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외식하는 자들이요,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책망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 뒤에 있는 추악한 신앙인격을 향해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만 좋으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만 좋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좋은 만큼 인격적으로도 좋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서 이같이 말씀합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있고, 신앙을 흉내 내는 자가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믿음과 함께 자신의 신앙 인격(양심)을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흉내 내는 생활이란, 믿음을 말하면서도 신앙인격(양심)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참 신앙인은 믿음과 인격(양심)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칭의’의 단계입니다.
‘칭의’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칭의의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둘째, ‘성화’의 단계입니다.
‘성화’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삶과 인격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영화’의 단계입니다.
‘영화’란, 죽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영화의 단계는 죽은 뒤에 천국에서 이뤄집니다.
우리는 대게 ‘칭의’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칭의’에서 멈추지 않고,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답게 인격과 삶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흉내 내는 자가 아닌, 신앙 생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은 시작이지만, 인격과 삶의 변화는 뒤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주간 이 새벽에,
‘나는 믿고 있는가’를 점검하기보다, ‘나는 변화되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2.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하)
두 번째,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절 하)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빌라도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묻고 싶은 내용이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그런데 이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실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감히 인간인 빌라도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 4:10)
지금 빌라도는 자기가 받아야 할 질문을 거꾸로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빌라도가 죽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은 빌라도에게 물으셨을 겁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실 겁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을 보면 마지막 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을 받은 자들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대답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3)고 책망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어떤 사역을 행하였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였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듣고 싶은 대답은 이것입니다.
“...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7:21)
3.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대답을 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둘째,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거룩’은 세상 또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입니다.
그런 삶의 핵심을 잘 말씀하신 곳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언제나 기도하고, 예수님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입니다.
‘믿음’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화요일 새벽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하였느냐’보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이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믿음으로 묵묵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됩시다.
4.
주님,
겉으로는 신앙을 지키는 것 같지만,
삶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며 살았던 모습을 회개합니다.
믿는다는 고백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제 나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소서.
오늘도 나의 삶 속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자가 되게 하소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영혼살리는 일에 전심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자녀답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신 예수님처럼,
이제는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묵묵히 따라가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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