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맙시다 /요 12:12-19
- Hoon Park

- 3월 15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29일
2026년 3월 12일(목)
1.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마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 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날 밤, 시몬의 집과 베다니 온 동네에 향유 향기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12절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찾는 자들이 있었고,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걸려 있는 현상금 때문이었습니다(11:56-57).
이들은 은 30냥이라는 현상금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기록된 ‘명절에 온 큰 무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로마로부터 자신의 민족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 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마저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생하게 직접 목격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가 되실 것이라는 생각으 로 예루살렘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무리들은 예수님을 맞으러 예루살렘 성 입구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들을 베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를 따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절)
‘호산나’라는 단어는 ‘지금 구원하소서. 지금 해방시켜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무리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로마의 식민 지배로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그들은 격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14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어린 아이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면 그것은 귀엽게 봐줄만 합니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우스꽝스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야요, 자신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왕으로 기대했던 예수님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 사람이 진정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줄 메시야일까? 저 사람이 진정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왕일까?...’
사람들은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일 때 실망하게 됩니다.
그 실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원망이 됩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리들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며 소리쳤던 무리들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2.
예수님 곁에서 걸어가는 제자들도 무리처럼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제자들은 서로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겠다고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타는 하얀 백마를 타고 가셨다면 제자들은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하게 따라갔을 겁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 새끼라니... 제자들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걸어갔을 겁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일 때, 실망하고 분노하고 원망하며 떠나갑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15절입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는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6절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이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예수님이 스가랴서의 말씀대로 그렇게 하신 것이구나.’
누구나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이 누구신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직분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경건이 무엇인지, 영성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걸까요? 지식을 쌓게 되면 깨달아지는 걸까요?
16절을 보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후’입니다.
한 마디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경 지식이 많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경험이 많다고 깨달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이같이 말씀합니다.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3.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강조되고 있는 것은 ‘성경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직 성경’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기준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세 가지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마틴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슬로건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최종 권위와 기준이다. The Bible alone is the ultimate authority and standard.’
맞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최종적인 권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성경은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경을 따르지 않습니다. 구시대의 유물 취급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도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요, 오늘도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오늘도 우리에게 최종적인 권위와 삶의 기준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같이 권면했습니다.
고전 4:6,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셨습니다. 성경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셨고,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성경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오실 예수님을, 성경대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고,
성경을 내 삶의 최종적인 권위와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4.
오늘은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그래서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소서.’
‘주님,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가게 하소서. 성경을 더 가까이 하게 하소서.’
‘주님, 성경이 내 삶의 최종적인 권위요, 내 삶의 기준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 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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