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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 속에서 예수를 바라보다 / 고후 12:7-10

2026년 1월 6일(화)

1.

연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고 살거나, 강한 척 하며 살 뿐입니다.


하나님께 위대한 능력을 받거나,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모두 연약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된 야곱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평가를 받은 모세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겼던 다윗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연약함이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에 역사적인 획을 그었던 바울 역시 연약함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이같이 담백하게 고백합니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 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엄청난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27권 중에 무려 13권을 기록했습니다.

아무리 초대형 교회를 일군 목회자라 할지라도 바울 앞에 명함을 내밀지 못할 만큼, 바울은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육체에 가시’라고 말하는 건강의 문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는지 학자들마다 일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연약함의 모습은 다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죄’는 연약함이 아닙니다.

누군가 ‘죄’를 연약함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죄의 심각성을 물 타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사탄의 사자”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해서 우리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우리를 낙망케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연약함은 사탄의 사자처럼, 나를 넘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연약함’에 대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7절, “...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내 안에 있는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오,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기도 하시고, ‘고난’을 주기도 하십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는 걸까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연약함을 주시는 것은)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점을 7절에서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있으면 교만합니다.

사람은 없거나, 부족하면 겸손해 보이는 것이지 인간은 결코 겸손한 존재가 아닙니다. 교만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를 믿거나 자기가 가진 것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불신앙이요, 겸손은 믿음입니다.


제일 무섭고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영적 교만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많은 영적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영적으로 교만해지기 쉬운 위험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라는 연약함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겁 니다.


사람은 교만해도,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만이 무섭습니다.

내가 교만한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기록된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내가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교만은 아주 치명적인 영적인 암과 같습니다.

암은 말기가 될 때까지 통증이 없습니다. 은밀하게 퍼집니다.

그런데 암은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때가 될 때 통증을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교만은 내 영혼에 은밀하게 퍼져가는 영적인 암입니다.

교만이 내 영혼에 깊이 퍼져갈 때까지 어떤 자각 증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교만이 내 영혼의 큰 중증이 될 때, 그때 내 영에 심각한 통증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는 것은,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 있는 연약함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둘째, (연약함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위해서입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연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통로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그리스도는 강하십니다.

나는 무능하지만 그리스도는 전능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기에, 나의 연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능력을 구하는 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구하는 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구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내게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주는 나의 소망, 나의 힘, 나의 능력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묵상하기보다, 나의 연약함 속에 능력으로 머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나의 연약함 속에 머무시는 힘과 능력이 되십니다.

그래서 나의 연약함은 오히려 축복의 코드입니다.


3.

그렇다면 ‘나의 연약함’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8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인 몸의 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바울을 치료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1장 이하를 보면,

주님은 바울을 통해서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몸의 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는 바울의 기도는 세 번이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때론 간절하게 기도해도 고쳐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때론 간절하게 기도해도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나의 마음을 공격해서 나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기도를 멈추게 만듭니다. 나의 믿음을 흔듭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그런데 주님은 바울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이 바울의 모든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 자신의 병 고침에 대해서만 응답하지 않으신 겁니다. 이 외에 바울에게 은혜가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 부족, 정성 부족, 믿음 부족’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주님의 이 말씀이 맞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다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넘치도록 응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런데 내가 간절하게 구하는 것 어느 한두 가지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나의 ‘연약함’으로 남겨 두십니다.


그 연약함을 통해서 나를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그 연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4.

오늘의 결론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내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데도,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고 내게 ‘연약함’으로 남겨 놓으신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 등입니다.


‘약한 것들’이란, 몸의 질병입니다.

‘능욕’이란, 사람에게 받는 모욕과 무시입니다.

‘궁핍’이란, 물질적인 결핍입니다.

‘박해’란, 핍박입니다.

‘곤고’란,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때 주님께 간구하지만,

주님이 때론 나의 연약함으로 이것을 남겨두십니다.

그래서 병약하거나, 능욕을 당하거나, 궁핍하거나, 박해를 받거나, 곤고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내게 주신 ‘연약함’들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연약하십니까?

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속이 상하십니까?

내게 남겨진 ‘약한 것들(질병), 능욕(모욕과 무시), 궁핍, 박해, 곤고’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오히려 그것들은 나를 자만하게 하지 않으시려고, 내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려고 내게 남겨두신 ‘연약함’ 이라는 것을 깨달읍시다.

그래서 내게 이런 ‘연약함’이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가 됩시다.

나의 연약함 속에서 더욱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됩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내게 강함이요, 온전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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