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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경계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느 13:1-14

2025년 12월 5일(금)


1.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백성들을 예루살렘 안에 거주하게 했습니다.

그후,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벽 봉헌 예배를 드렸습니다.

봉헌 예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던지 예루살렘 밖에까지 그들의 기뻐하는 소리가 들 릴 정도였습니다(12:43).


예배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한 번 성공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까지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신앙적인 삶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크게 말씀의 은혜를 한 번 받았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예배를 한 번 드렸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변화는 한 두 번의 충만한 신앙체험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삶 속에서 신앙의 기준을 정하고,

그 정해진 기준을 따라 매일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훈련(노력)을 통해서 서서히 이뤄집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가지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1절입니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제시한 삶의 기준은 ‘모세의 책’, 곧 ‘성경’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신명기 23장 3-4절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암몬과 모압’ 사람은 하나님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과 그들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기 록한 내용입니다.


신명기 23장 3-4절의 말씀은, 민수기 23장에 기록된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2절). 저주를 사주한 발락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은 자들입니다(갈 3:13).

그래서 세상의 악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한다 할지라도, 결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한 자들에게 저주가 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 저주하는 말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됩니다.


발락이 뇌물을 주고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 때문에,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신명기 23장 3-4절의 말씀을 낭독해 주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는 자신들 안에 섞여 있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합니다(3절).


여기서 ‘분리했다’는 것은 ‘경계를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삶의 변화는 말씀을 기준으로 삶의 경계를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신앙의 자유는 삶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자유는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삶의 경계 안에서 주어집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와 관용주의의 핵심은 삶의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가정에서는 아빠와 엄마의 경계를 허물고, 종교와 종교의 경계를 허뭅니다.

그래서 동성애와 트랜스 젠더가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아빠는 남자요 엄마는 여자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종 교에는 다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가 성행합니다.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워지기 위해서는 바르고 분명한 삶의 경계를 갖아야 합니다.

그 경계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삶에 ‘분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2.

이후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있는 바벨론 도성으로 돌아갑니다(6절).

성벽 재건하는 일을 마쳤으니, 왕과 약속한 대로 돌아간 것입니다(2:6).

그런데 6절하반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왕에게 말미를 얻어서 다시 예루살렘에 찾아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성전의 거룩함이 무너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시 성전의 거룩함을 회복합니다.


먼저, 4-9절까지는 제사장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성전 방 하나를 거주하도록 내어준 것입니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으로 산발랏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자입니다(2:10).


성벽 봉헌식을 한 날, 느헤미야가 낭독해준 신명기 23장 3-4절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 안에 섞여 있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을 분리해냈습니다. 이때 도비야 역시 분리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궁에 다녀오는 동안에,

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 사람 도비야를 성전 안에 거주하게 한 것입니다.


도비야는 암몬 사람이요, 성벽 재건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왜 그런 도비야를 성전 안에 거주하게 하였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엘리아십과 도비야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있어서, 그 때문에 성전 안에 거주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도 분명한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관계성 때문에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 ‘타협’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죄와 타협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성 때문에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는 8절을 보면 “심히 근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왜 심히 근심했을까요?

그것은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없는 유다에서 가장 높은 지도자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암몬 사람 도비야를 성전 안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놓고 기도하며 심히 근심했던 겁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엘리아십과의 인간적인 관계성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택합니다.

과감하게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내던지고, 방을 정결케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도비야를 분리시키고, 다시 성전의 거룩함을 회복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인간적인 관계성 때문에 말씀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적인 타협을 했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경계 때문에 도비야를 성전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아가서 2장 15절에서 이같이 말씀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을 허무는 것은 작은 여우 한 마리입니다.

인간적인 관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실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우리 삶에 침투한 작은 여우입니다.

그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의 관계성이 불편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도비야를 쫓아냄으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았습니다.


3.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섬겨야 할 레위인들이 성전을 떠나 생업의 현장으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를 10절에 이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부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 하였기로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받지 못하자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떠나 생업의 현장으로 도망간 겁니다.

이를 알게 된 느헤미야가 지도자들을 불러 꾸짖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자기 자리에 세워둡니다(11절).

그런 후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성전 곳간에 들이게 했습니다(12절).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레위 사람들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성전을 섬기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돈을 따라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하나님 보다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돈을 잘 관리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십일조나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것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바르게 사용해야 합 니다.


십일조나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유지하는 일에 함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헌금한 것을 교회가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헌금을 교회를 바르게 유지하는 일에 잘 사용해야 합니다.


레위인들이 생계의 어려움 때문에 성전에서 생업의 현장으로 도망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레위인들의 소명 부족으로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르게 해결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십일조를 성전 창고에 들이게 했고, 성전 관리자들이 이것을 잘 관리하여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게 하여서,

도망간 레위인들이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섬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 바르게 해결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필요한 지혜를 주십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삶의 경계가 명확한 자가 됩시다.

삶의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삶의 경계가 흐린 자는 쉽게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경계가 명확한 자는 타협하며 살지 않습니다.


신앙과 공동체의 거룩함이 무너지는 것은 말씀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사라질 때입니다.

경계가 흐려질 때, 우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이 침입합니다.

결국 그 작은 여우들 때문에 우리 포도원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경계로 삼고, 삶의 경계가 명확한 자가 되길 기도합시다.


두 번째,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됩시다.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요,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 가정에도 문제가 늘 있습니다. 공동체에도 문제가 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늘 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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