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눅 21:20-28
- Hoon Park
- 4월 11일
- 4분 분량
2025년 4월 11일(금)
1.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5절을 보면,
제자 몇 사람이 감람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넋을 잃고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20절부터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질 징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의 초점은 ‘말세의 징조가 무엇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세의 징조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질 징조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무너질 징조가 나타날 때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이 말씀대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포위를 당합니다.
이런 징조가 나타날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 21절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한 마디로,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 밖으로 도망가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맹신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만큼은 결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요,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성읍들은 다 멸망해도, 결코 예루살렘만큼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신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날은,
22절에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로마 군대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징벌하시는 날”입니다.
이날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방에 사로잡혀 가는 날이요,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는 날이 오면,
그것을 징조로 알고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가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의 장면을 기록한 역사책을 보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했었습니다.
그때 마침 황제 네로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잠시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가 느슨해졌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하신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는, 성 밖으로 탈출을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교회와 성도들의 피해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포위당할 때 막연하게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결국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막연하게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라는 맹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알아갈 때 바른 분별력을 갖게 되고,
바른 분별력으로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성도로서의 믿음의 삶입니다.
2.
24절 하반절을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고 하신 구절을 주목해봅시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서 49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은, 이방에 복음의 빛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이방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와도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뜰에는 환전상들과 가축 파는 자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시자마자 그들을 몰아내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단지 아브라함을 복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방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축복하신 것은,
이방이 예루살렘을 통하여 복을 받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것도,
우리를 통하여 이방이 복을 받는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이방의 빛으로서 복의 통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빛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촛대를 이방인에게로 옮기신 겁니다.
언제까지일까요?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입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서는 “(구원 받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무슬림 사원입니다.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구원 받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입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촛대는 다른 나라와 대륙으로 옮겨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을 지나 다시 중동으로, 그리고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서서히 옮겨질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5-26절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 교회가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의 사람, 은혜의 사람, 복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의 통로요, 은혜의 통로요,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3.
27절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때”는 언제입니까?
‘구원 받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찰 때’입니다.
그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영원히 썩어지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고 오십니다.
그날, 성도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그날이 바로 성도들이 영원히 죄와 죽음으로부터 속량 받는 날입니다.
구원 받는 날입니다.
4.
첫 번째,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갖기를 기도합시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은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 때 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믿음과 맹신은 다릅니다.
맹신은 분별력 없는 신앙의 행위라면, 믿음은 분별력 있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맹신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은 분별력 있는 믿음입니다.
말씀은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분별력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함은 성경을 분별력 없이 맹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잘못된 확신과 거짓 가르침과 이단에 빨려 들어갑니다.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알고, 말씀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맹신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됩시다.
특히 종말의 시대에는 이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둘째,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케 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 복음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촛대는 언제는 우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망각할 때, 그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복음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까 두렵습니다.
구원 받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우리가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모두 일어나 머리를 들어 주님이 내려주시는 속량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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