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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여야 할 일입니다 /눅 17:1-10

  • 작성자 사진: Hoon Park
    Hoon Park
  • 4월 10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6일

2025년 329일(토)

1.

오늘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1-3절 상반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실족하다’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입니다.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은 ‘덫, 함정, 올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죄를 짓게 하다,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에는 모두 29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한계를 아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게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2절,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에서 ‘작은 자’란, ‘신앙이 연약한 자, 또는 신앙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연약하거나 신앙이 없는 자를 실족하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 마디로, ‘남을 실족시키려거든, 차라리 네가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신앙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그만큼 조심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1절).


세상의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야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겁니다.

신앙이 연약한 자나 없는 자들이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겁니다.

왜요? 신앙이 연약한 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이 강한 자들이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같이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믿음 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배려하는 것, 이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3절 상반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저래?’라는 이야기를 듣기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구나’라는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을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거나 없는 자들을 실족시켜서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나을 만큼 주님을 분노케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3절 중반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람은 가까워질수록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받습니다.

상처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라서,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하지 내가 준 상처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상처는 상호적인 것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상처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 늘 상처를 줍니다.

4절에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넘게 죄를 짓고 삽니다.


USC의 심리학자 제럴드 제리슨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 평균 200번의 거짓말을 한답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거짓말 외에도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죄, 미워하는 죄, 욕하는 죄, 속이는 죄, 마음으로 품는 음란이라는 죄 등...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상처가 없으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바다 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상처를 받지 않으신다고 해서 아프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상처는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용서가 잘 안됩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주님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데 왜 당신은 그렇게 못하냐’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처럼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도 여러분에게 ‘용서하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용서하라’가 아니라, “너는 용서하라”고 콕 집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용서하라구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용서하랍니다.


제가 하는 말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용서가 잘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우리의 마음은 세수 대야처럼 좁고 얕아서 용서와 용납이 잘 안되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와 용납하라는 말씀입니다.


3.

예수님께서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자,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5절).


용서하려면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더하소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용서는 사랑의 문제인 것 같지만, 실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믿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비유 이야기도 바로 ‘믿음으로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믿으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줄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믿으면’,

내게 죄를 짓거나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용서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용서 받았다’는 것도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날마다 회개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는 용서 받을 수 없고, 믿음 없이는 용서해 줄 수도 없습니다.

용서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내게 죄 짓는 자를 용서하는 것도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만 있어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믿음은 겨우 겨자씨 한 알만한 작고 보잘 것 없는 믿음일지라도,

그 작은 믿음으로 용서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런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큰 사랑이 없어서 용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이 없어서 용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입니다(막 9:24).


7절부터 10절까지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9-10절만 봅시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문맥상 앞서 살펴본 세 가지입니다.

첫째, 다른 사람이 실족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삶을 살아라.

둘째, 내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라.

셋째,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살아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렇게 다 행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행한 다음에는,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은 무익한 종인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4.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스스로 조심하는 자가 됩시다.

믿음이 없는 자나 부족한 자들이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혜’와 ‘배려’입니다.

성령님께 그 지혜와 배려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두 번째, 용서하는 자가 됩시다.

용서는 사랑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있어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아버지께 큰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도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달라고 기도합시다.


세 번째,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는 자가 됩시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요,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종으로서 주님에게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가 이와 같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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